안녕하세요. 팔방미남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마태복음 1:18~25 입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잉태하자 가만히 인연을 끊고자 했고, 이에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어찌 된 일인지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며 제가 느끼고, 생각했던 과정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한 이유가 무엇일까?

처음 이 구절을 봤을 때 한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왜 가만히 끊고자 했을까요? 동거 전에 마리아가 잉태를 한 것이 어떤 의미를 지녔기에 그럴까요? 문화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보니, 생각해 볼 선택지가 많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들었던 생각은 혹시 요셉이 자신과 동침하지 않았음에도 미리아가 아기를 잉태했으니, 다른 남자와 동침한 것으로 오해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1:19)이기에 이를 가만히 끊으려고 했던 것이죠. 물론 이 가정이 말은 되지만, 그러면 뒤에 주의 사자가 꿈에 나와서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한 부분이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굳이 왜 무서워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오해하지 말라"라고 했으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말이죠. 뭘 무서워할 상황이었을까요? 주석을 찾아보니 신명기 22:23~24 내용을 알려주더군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녀가 남자와 약혼한 후 다른 남자와 동침을 하면 둘 다 돌로 쳐 죽이라는 내용입니다. 저는 여기서 요셉의 무서워했던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는 '요셉이 무서워했던 것은 마리아가 죽는 것 때문이 아니었을까?'였습니다. 다른 남자와 동침했다는 것(요셉의 오해였지만)이 비록 화가 나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던 마리아가 이로 인해 죽게 될까봐 그것이 무섭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렇게 돌로 쳐 죽임을 당할 일이 만약 세상에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별로 안 좋은 평판을 받게 될 것이 분명하기에 주변의 뭇매질을 무서워한게 아닌가?하는 생각입니다. 어떤 이유인지 지금의 저로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이건 물음표로 남겨놓으려고 합니다. 때로는 무리한 억지 해석보다는 질문 자체로 남겨놓는 것이 나을 때도 있으니깐요. 어찌되었건 하나님은 요셉의 심중에 있는 무서움의 근원을 정확히 아시기에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주의 사자

아기를 처음 갖게 되면 부모들이 해주는 일 중 하나가 바로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입니다.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무슨 이름으로 할 지 이미 다 생각해놓죠. 작명소에서 짓는 경우도 있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지어주는 경우도 흔합니다. 어쨌든 이름을 짓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런데 요셉은 적어도 이름 짓는 문제에 있어서는 좀 편했을 것 같습니다. 주의 사자가 친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정해줬으니 말이죠. 아니죠. 혹시 압니까? 요셉은 마리아와 이전에 이미 아들이나 딸을 낳으면 어떤 이름으로 할 지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편한게 아니고, 지어주고 싶은 이름이 있었는데 못한 것일테죠. 성경에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이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요셉에게 아기의 이름을 지을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에 주목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 장면은 아담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담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그들을 다스릴 권세를 갖게 되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결국 요셉의 아들이긴 하나, 예수는 요셉의 권세가 아닌 하나님의 권세로 다스려지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임마누엘의 뜻은 23절에 나와있듯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주석을 살펴보니 이 임마누엘이라는 예수의 또다른 이름은 복음서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단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 민족 편에 계시다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와서 우리와 동고동락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임마누엘은 성육신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구절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임마누엘

앞에서 살펴봤던 예수의 계보 부분을 보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메시아이신 예수)"라는 단어가 떠오르듯이, 오늘 말씀은 "임마누엘"이라는 단어로 함축할 수 있겠네요.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 속에 성육신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깊었습니다.